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전쟁 (문단 편집) === 제1차 대구 전쟁 === ||[[파일:external/www.lhg.is/12milur-sm.jpg|width=100%]]|| ||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 - 12해리 || 1945년 [[미국]]은 자국의 해양 유전을 보전할 목적으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륙붕]]의 자원은 연안국이 관리한다는 내용으로 그전까지 대륙붕은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 이에 아이슬란드는 살짝 끼어들어 자국의 어업전관수역을 3해리에서 4해리로 늘린다고 했다. 그리고 1958년 9월 마침내 마음을 크게 먹은 아이슬란드 정부는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늘리겠다고 나섰으며 이 수역 내에서는 외국 어선을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아이슬란드에 대해 '통상의 [[영해]] 밖의 어업에 관해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은 해양법에 어긋나는 부당 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그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다만 18세기부터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 서방국가들에서는 관습적으로 3해리까지를 영해로 인정했는데 이는 18세기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였다. 따라서 국가마다 3해리나 여기서 조금 더한 정도를 영해로 선포했는데 20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12해리를 영해로 선포하는 국가가 늘어났다.]고 항의 성명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 정부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영국 정부는 어업 선단에 [[구축함]]과 [[호위함]]을 호위로 붙여 보냈고 아이슬란드는 이에 맞서 [[경비정]]을 파견했다. 그러나 원래 [[저인망]] 어업은 넓은 수역에서 조업을 해야 효율적인데 군함의 호위가 붙은 이상 좁은 곳에 모아놓고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영국 [[어선]]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58년 10월, 아이슬란드의 경비정이 영국의 트롤 어선에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해 영국 어선이 도망가는 사태가 있었다. 11월에는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어선인 핵네스에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영국 어선은 이를 무시, 결국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2발을 발포했다. 이에 영국의 구축함 HMS 러셀이 다가와 경비정 토르에 대해 물러나라고 했지만, 토르의 함장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HMS 러셀에서 영국 어선 쪽에 한 발이라도 더 쏘면 격침시켜버리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체급면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던 아이슬란드 경비정은 후퇴하고 만다. 몇 번의 마찰이 계속 일어났지만 최종적으로 1961년 2월, 영국이 아이슬란드 정부가 발표한 12해리 어업전관수역을 인정하는 형태로 1차 대구전쟁은 막을 내렸다. 다만,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12해리까지는 인정하겠지만 이후 아이슬란드의 주장을 원천 봉쇄하기로 결정한 것. 당시 아이슬란드의 야당에서는 이 조약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체결되고 만다. 1차 대구전쟁에서 아이슬란드의 전력은 경비정 6척과 경비원 100명이 전부였지만, 영국이 파견한 함정은 모두 합쳐 군함 37척에 승무원만 7000명이나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